되돌아보면, 내가 ≪자치통감(資治通鑑)≫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반세기에 가깝다. 1960년대 말,‘자치통감을 읽고 평론’한 명 왕조 말기의 학자 왕부지(王夫之)의 ≪독통감론(讀通鑑論)≫을 가지고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≪독통감론≫에서 평론한 대목을 ≪자치통감≫의 원문을 찾아보는 데서부터 인연이 시작되었다. 이후 대만에 유학하여 쓴 박사학위 논문도 ≪자치통감≫을 주제로 한 것이었고, 역사학자로서의 삶 또한 줄곧 이와 관련된 논문을 써왔으니, 나의 공부는‘자치통감’이라고
해도 될 듯싶다.
유절이 ≪중국사학사고≫에서“송대 역사학계에서 당연히 대서특필할 몇 개의 사건이 있는데, 그 첫 번째 사건은 바로 사마광이 ≪자치통감≫을 저술한 것”이라며“통치계층이 오랜 기간 동안 경험한 것을 쌓아둔 중심사상을 대표”하는 것이 바로 ≪자치통감≫이라고 평가했다.
내가 이런‘제왕학의 교과서’인 ≪자치통감≫ 번역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97년부터다. 학자의 길에서 잠시 비켜서게 했던‘대학의 보직’에서 놓여나면서 세속적인 일에 전력투구하였던 10여년의 세월을 반성하듯 이 책의 번역에 매달리기로 했던 것이다. ≪자치통감≫ 전294권을 완역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부터가 만용이었지만, 점차 이런 우직한 작업을 하지 않고서는 이 대역작을 대중에게 소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만용에서 어느덧 사명이 되어있었다.
몇 년 전 전국시대부터 전한시대까지의 38권을 4책으로 묶어 우선 출간하면서 번역 작업의 첫 결실을 맺었지만 이 작업은 말 그대로 인내력의 시험장이었다. 그 인내력이 한계를 드러낼 즈음인 2002년, 마침 한국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번역지원금을 받게 되면서 번역작업에는 전기가 마련됐다. 이 작업에 3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김동정, 조재덕, 신용석, 변상필 박사와 일정 기간을 참여한 이재성, 정지호, 이춘복 박사 등과 함께 번역팀을 꾸려 갖은 고생을 하면서
비교적 작업 속도를 낼 수 있어 2005년 말에 완역된 원고를 한국학술진흥재단에 보고할 수 있었다.
이제 이 원고를 책으로 묶어 세상 독자들과 만나려고 한다. 학술진흥재단에 완역된 원고를 내기까지도 적어도 두 번 이상 원문대조교정을 보았었고, 이번에 출간을 준비하면서 다시 세 번의 원문교정을 통하여 오역을 바로잡고, 번역어휘와 문체, 체제를 통일하느라 때로는 다시 밤을 낮같이 밝혀야 하지만 전체 원고량이 200자 원고지 8만 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600여 쪽짜리 책 31권으로 묶는 작업이 또다시 인내력을 시험하고 있다.
번역과 교정 작업에 매달리면서도 항상 적절한 우리말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. 예컨대 성(城)을 공격하여 승리한 경우에도 원문에서는 상황에 따라‘하(下)’라고 하기도 하고, 혹은‘극(克)’,‘입(入)’,‘첩(捷)’,‘함(陷)’,‘도(屠)’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. 전투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. 그러나 번역서의 특성상 우리말로 옮길 때 간결한 단어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그 함의를 길게 설명해 줄 수도 없고, 그렇다고 모두 우리
귀에 익숙한 낱말인‘승리하다’라고만 표현한다면 원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뉘앙스를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.
더욱이 이 책은 당송팔대가(唐宋八大家)가 한참 활동하던 시기의 저작이어서 문장은 우아했고, 한 글자 한 글자에 그 나름의 깊은 의미를 지니며, 헛되이 쓰인 글자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우리말을 찾는 작업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. 그래도 끝까지 원문의‘맛’을 살려 보려는 욕심을 놓지 않으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.
이 책은 전31권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하는‘전국(戰國)·진(秦)시대’이다. ≪자치통감≫의 원문으로는 권1부터 권8권까지를 번역한 것이다.
이 책의 번역이 끝나갈 무렵인 2005년 말,‘자치통감 방역계획(資治通鑑 邦譯計劃)’을 세우고 번역자를 모집하는 일본의 광고를 보니‘한문초심자도 OK’라는 구절이 눈길을 끌었다. 전문가조차 쉽게 엄두를 낼 수 없어서 지원자가 적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고,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초보자로라도 번역해야겠다는 의미일터, 반세기에 걸친 고집스런 나의 소망과 10년을 매달린 우직함이 일본에 앞서서 이 책의 번역본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자그마한 감동과 위안을 발견한다.
이 번역본은 ≪자치통감≫을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만들기 위한 주춧돌 놓기에 불과하다. 이 책을 통하여 중국대륙을 통일한 모택동이 대장정 시기에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은 이유를 우리나라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. 그래서 역사학은 미래의 문화산업의 기틀이 되는 것도 이해하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성화되었으면 더 없는 기쁨일 것이다.
이 책의 번역 상 생길 수 있는 문제점들은 동료 후학들의 열정적인 문제제기와 학문적 토론으로 하나하나 바로잡아지길 바란다. 그래서 보다 나은 개정판이 만들어져 원전으로서의 구실도 할 수 있길 기대하며 독자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질정을 기대한다.
마지막으로 어려운 여건에서 이 책을 아담하게 만드느라고 애쓴 도서출판 삼화와 조성일 선생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.
2007년 9월
삼화고전연구소에서 권 중 달 적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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